사카타 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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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타 에이오는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로, 1935년 프로가 되어 2000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1961년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하며 7연패를 달성하여 명예 혼인보가 되었고, 1963년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여 명인과 혼인보를 동시에 석권했다. 1964년에는 7개의 주요 타이틀을 보유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카타는 통산 64개의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면도날 사카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기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0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2019년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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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타 에이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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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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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카타 에이오 |
한자 표기 | 坂田 栄男 |
가나 표기 | サカタエイオ |
출생일 | 1920년 2월 15일 |
출생지 | 도쿄도 |
사망일 | 2010년 10월 22일 |
사망 장소 | 도쿄도 |
사망 원인 | 대동맥류 |
거주지 | 도쿄도, 일본 |
스승 | 마스부치 다쓰코 |
프로 입단 | 1935년 |
은퇴 | 2000년 |
단 | 9단 |
소속 | 일본기원 |
타이틀 정보 | |
타이틀 합계 | 64회 (역대 3위) |
7대 타이틀 합계 | 21회 (역대 6위 타이) |
타이틀 내역 | |
명인 | 2기 (1963-64) |
본인방 | 7기 (1961-67) |
왕좌 | 7기 (1961, 1963-64, 1966, 1970-72) |
10단 | 5기 (1966-68, 1972-73) |
기타 정보 | |
통산 성적 | 1117승 654패 16무승부 |
2. 생애
사카타 에이오는 1935년 프로 바둑 기사가 되었다. 1951년 하시모토 우타로에게 도전한 혼인보전은 관서 기원 소속의 하시모토를 상대로 일본기원의 타이틀을 되찾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치러졌다. 사카타는 초반 3승 1패로 앞섰으나, 하시모토의 반격으로 3승 4패로 패했다. 이후 일본 내 거의 모든 타이틀을 석권했지만, 혼인보 타이틀만은 얻지 못했다.
1961년, 다카가와 가쿠에게 도전하여 혼인보를 획득, 7연패를 달성하며 명예 혼인보(23대 혼인보 에이오) 칭호를 얻었다. 1963년 명인 타이틀까지 획득하며 양대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한 최초의 기사가 되었다. 1964년에는 30승 2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명인, 혼인보, 일본기원 선수권, 아사히 프로 최고 10, 오자, 일본기원#1, NHK배 등 7개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
1965년 명인전에서 23세의 린하이펑에게 패배, 이후 2년간 도전했으나 명인 타이틀 탈환에 실패했다. 린하이펑은 이후 사카타에게서 혼인보 타이틀마저 빼앗았다. 사카타는 이후 십단, 오자 등 다른 타이틀을 획득하며 활약했다.
사카타는 바둑 관련 서적을 다수 저술했으며, ''현대 포석과 포석'', ''바둑의 중반전'', ''바둑의 급소와 악수'', ''바둑의 살수'' 등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었다.
2010년 10월 22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바둑 입문
마스부치 다쓰코의 문하에서 바둑을 배웠다. 1935년 프로 바둑 기사가 되었다.[1] 도쿄부 에바라군 오모리 정 (후의 도쿄시 오모리구, 현 도쿄도 오타구)에서 태어났다. 바둑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바둑을 배우고, 1929년에 마스부치 타츠코 2단에게 입문하여 다음 해 일본기원 원생이 되었다. 1933년 입단 시험에서는 유력한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선배들이 장고를 반복하여 철야 승부를 벌인 탓에 체력이 달려 입단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다음 해부터는 입단 시험에도 제한 시간제가 도입되었다.
2. 2. 일본기원 원생 시절
1929년에 마스부치 타츠코 2단에게 입문하여 다음 해 일본기원 원생이 되었다.[1] 1933년 입단 시험에서는 유력한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선배들이 장고를 반복하여 철야 승부를 벌이는 바람에 체력이 달려 입단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다음 해부터는 입단 시험에도 제한 시간제가 도입되었다. 1935년에 입단하였다.2. 3. 전후 활동과 일본기원 복귀
1946년에 재개된 대국에서 7단으로 승단했다.[1] 1947년, 일본기원에 불만을 품고 마에다 친지 7단, 가지와라 다케오 5단 등 8명의 기사들이 바둑 신사를 결성하여 일본기원을 탈퇴했다.[1] 1948년 우칭위안과의 세 판 기(사카타 선상선)에서 3연패했다.[1] 이어서 가지와라도 선번 역 코미로 우칭위안에게 패배하여 의기소침했고, 1949년에 전 기사가 일본기원으로 복귀했다.[1]2. 4. 혼인보 7연패와 명인 획득
1961년 다카가와 가쿠로부터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후 7연패하여 명예 혼인보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혼인보, 왕좌, 일본기원 제1위의 3개 타이틀 외에 최고위, 최강위, 일본기원 선수권, NHK배를 합쳐 7개 타이틀을 제패했다.[1]1963년에는 제2기 명인전에서 후지사와 히데유키를 꺾고 '''명인 본인방'''을 겸하며 바둑계의 1인자가 되었다.[1] 1964년에는 다시 7관왕에 올랐다.[1] 1964년부터 1966년까지 혼인보전에서 다카가와 가쿠, 야마베 토시로, 후지사와 히데유키를 상대로 4-0 완승을 거두는 등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이 시기에 1963년 10월부터 1964년 7월까지 일반 기전에서 역대 1위인 29연승과, 연간 최고 승률 .9375(30승 2패, 1964년)를 기록했다.[12]
29연승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순번 | 날짜 | 기전 | 결과 | 상대 |
---|---|---|---|---|
1 | 1963년 10월 11일 | 제11기 왕좌전 준결승 | 중반 | 시마무라 토시히로 9단 |
2 | 1963년 10월 21일 | 제11기 왕좌전 결승 3번기 1국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3 | 1963년 10월 28일 | 일본기원 선수권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4 | 1963년 11월 4일 | 제11기 왕좌전 결승 3번기 2국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5 | 1963년 11월 13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준결승 | 중반 | 마에다 겐지 9단 |
6 | 1963년 11월 29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 결정전 | 중반 | 시마무라 토시히로 9단 |
7 | 1963년 12월 19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1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8 | 1964년 1월 2일 | 제11회 NHK배 쟁탈 바둑 토너먼트 1회전 | 중반 | 한다 도겐 9단 |
9 | 1964년 1월 7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2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10 | 1964년 1월 15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3국 | 3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11 | 1964년 2월 6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중반 | 오오쿠보 이치겐 7단 |
12 | 1964년 2월 13일 | 제1기 십걸전 본선 | 중반 | 오오타케 히데오 6단 |
13 | 1964년 2월 20일 | 제4기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 도전기 1국 | 중반 | 오오히라 슈조 9단 |
14 | 1964년 2월 27일 | 제1기 십걸전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15 | 1964년 3월 1일 | 제11회 NHK배 준결승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16 | 1964년 3월 5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1집반 | 하시모토 쇼지 9단△ |
17 | 1964년 3월 12일 | 제4기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 도전기 2국 | 중반 | 오오히라 슈조 9단△ |
18 | 1964년 3월 15일 | 제11회 NHK배 결승 | 중반 |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 |
19 | 1964년 3월 19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7집반 | 사토 나오오 9단△ |
20 | 1964년 3월 25일 | 제12기 왕좌전 본선 | 중반 | 카다 카츠시 8단 |
21 | 1964년 4월 1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22 | 1964년 4월 7일 | 제1기 십걸전 결승 3번기 1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3 | 1964년 4월 11일 | 제1기 십걸전 결승 3번기 2국 | 2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4 | 1964년 4월 21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1국 | 1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5 | 1964년 5월 1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2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6 | 1964년 5월 13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3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7 | 1964년 5월 25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4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8 | 1964년 7월 2일 | 제12기 왕좌전 본선 | 중반 | 하야시 히후 7단△ |
29 | 1964년 7월 29일 | 제3기 구 명인전 도전기 7번기 1국 | 4집 |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 |
2. 5. 린하이펑과의 라이벌 관계
1965년 명인전에서 사카타 에이오는 당시 23세였던 린하이펑의 도전을 받았다. "20대의 명인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사카타의 우세를 점쳤으나, 예상을 깨고 2-4로 린하이펑에게 명인 자리를 내주었다.[1] 이후 2년 연속 도전했지만 명인 타이틀을 되찾지 못했다. 1967년 혼인보전에서는 린하이펑의 도전을 물리쳤지만, 1968년에 패배하여 1인자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1]2. 6. 노년과 은퇴
사카타 에이오는 1983년 NEC배 우승으로 통산 타이틀 64개를 획득했다.[1] 이는 2002년 조치훈에게 깨지기 전까지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1989년에는 69세의 나이로 혼인보전 본선 리그에 복귀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2000년 2월 15일, 80세 생일에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2009년부터 일본기원 명예 고문으로 활동했다. 2010년 흉부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1]2. 7. 사망
2000년 2월 15일, 80세 생일에 현역에서 은퇴했다.[1] 2009년부터 일본 기원 명예 고문을 맡았다.[1] 2010년 흉부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1]3. 기풍
사카타 에이오는 귀신같은 타개 솜씨와 묘수를 찾아내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특히 부분전에서 뛰어났으며, 탁월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적진을 파고드는 기풍 때문에 '면도날 사카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2] 1963년 10월 11일부터 1964년 7월 29일까지 29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1위 기록이다.[12]
날짜 | 기전 | 결과 | 상대 | |
---|---|---|---|---|
1 | 1963년 10월 11일 | 제11기 왕좌전 준결승 | 중반 | 시마무라 토시히로 9단 |
2 | 1963년 10월 21일 | 제11기 왕좌전 결승 3번기 1국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3 | 1963년 10월 28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4 | 1963년 11월 4일 | 제11기 왕좌전 결승 3번기 2국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5 | 1963년 11월 13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준결승 | 중반 | 마에다 겐지 9단 |
6 | 1963년 11월 29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 결정전 | 중반 | 시마무라 토시히로 9단 |
7 | 1963년 12월 19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1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8 | 1964년 1월 2일 | 제11회 NHK배 쟁탈 바둑 토너먼트 1회전 | 중반 | 한다 도겐 9단 |
9 | 1964년 1월 7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2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10 | 1964년 1월 15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3국 | 3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11 | 1964년 2월 6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중반 | 오오쿠보 이치겐 7단 |
12 | 1964년 2월 13일 | 제1기 십걸전 본선 | 중반 | 오오타케 히데오 6단 |
13 | 1964년 2월 20일 | 제4기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 도전기 1국 | 중반 | 오오히라 슈조 9단 |
14 | 1964년 2월 27일 | 제1기 십걸전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15 | 1964년 3월 1일 | 제11회 NHK배 준결승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16 | 1964년 3월 5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1집반 | 하시모토 쇼지 9단△ |
17 | 1964년 3월 12일 | 제4기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 도전기 2국 | 중반 | 오오히라 슈조 9단△ |
18 | 1964년 3월 15일 | 제11회 NHK배 결승 | 중반 |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 |
19 | 1964년 3월 19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7집반 | 사토 나오오 9단△ |
20 | 1964년 3월 25일 | 제12기 왕좌전 본선 | 중반 | 카다 카츠시 8단 |
21 | 1964년 4월 1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22 | 1964년 4월 7일 | 제1기 십걸전 결승 3번기 1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3 | 1964년 4월 11일 | 제1기 십걸전 결승 3번기 2국 | 2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4 | 1964년 4월 21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1국 | 1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5 | 1964년 5월 1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2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6 | 1964년 5월 13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3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7 | 1964년 5월 25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4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8 | 1964년 7월 2일 | 제12기 왕좌전 본선 | 중반 | 하야시 히후 7단△ |
29 | 1964년 7월 29일 | 제3기 구 명인전 도전기 7번기 1국 | 4집 |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 |
'면도날 사카타' 외에도 '수비의 사카타', '무딘 칼 사카타', '공격의 사카타'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 뛰어난 실력으로 '대(大)사카타'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카가와 카쿠는 사카타에게 많은 타이틀을 빼앗겼으며, 타이틀전 대결 전적은 사카타의 14승 1패였다. 조치훈은 육단 시절 일본기원 선수권에서 사카타에게 도전하여 2연승 후 3연패를 당했고, 이후 사카타에게 12연패를 당했다.
린하이펑은 사카타에 대해 "모든 기전에 전력 투구하며 '전부 이긴다'는 무서움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14]
4. 업적 및 평가
사카타 에이오는 1935년 프로 바둑 기사가 된 후, 1961년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하고 이후 7연패를 달성하여 명예 혼인보 자격을 얻었다. 1963년에는 명인 타이틀까지 획득하며 선수권제 최초로 명인과 혼인보를 동시에 석권, 바둑계의 1인자로 등극했다. 1964년에는 7관왕에 오르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1]
비록 1965년과 1968년에 린하이펑에게 명인과 혼인보 타이틀을 차례로 내주며 1인자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이후에도 십단, 왕좌, 일본기원 선수권 등 여러 타이틀을 획득하며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1979년에는 59세의 나이로 명인전 최고령 도전자가 되었으나 오다케 히데오에게 패했다. NHK배에서는 통산 11회 우승하여 명예 NHK배 자격을 획득했다.[1]
1983년 NEC배 우승으로 통산 타이틀 획득 수를 64개로 늘렸으며, 1989년에는 69세의 나이로 혼인보전 본선 리그에 복귀하는 저력을 보였다. 통산 타이틀 획득 수 64개는 역대 2위 기록이며,[1] 1964년에는 연간 30승 2패라는 역대 최고 승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일반 기전 29연승, 동일 타이틀전 17연승(제18기 혼인보전 제5국~제22기 혼인보전 제3국) 등 여러 부문에서 역대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2]
사카타 에이오는 뛰어난 실력으로 "대(大)사카타"라고 불렸으며, 다카가와 가쿠는 사카타에게 많은 타이틀을 빼앗겼다. 조치훈 또한 사카타에게 12연패를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사카타는 "모든 기전에 전력 투구"하는 자세로 임했으며, 대국에서 진 상대는 같은 날 두 번 지는 셈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투지가 넘쳤다.[14]
다음은 사카타 에이오의 주요 기록들이다.
국내 기전 | ||
---|---|---|
기전 | 우승 | 준우승 |
명인 | 2 (1963-1964) | 4 (1965–1967, 1979) |
본인방전 | 7 (1961–1967) | 4 (1951, 1968, 1970, 1975) |
오자전 | 7 (1961, 1963-1964, 1966, 1970–1972) | 3 (1956, 1968, 1973) |
십단전 | 5 (1966–1968, 1972-1973) | 3 (1969, 1974, 1977) |
NEC배 | 1 (1983) | 1 (1984) |
NHK배 | 11 (1957–1959, 1961-1962, 1964-1965, 1972, 1976-1977, 1982) | 2 (1956, 1970) |
기성 | 12 (1955–1961, 1964-1965, 1973–1975) | 2 (1962, 1966) |
아사히 프로 베스트 10 | 3 (1964, 1967, 1969) | 1 (1968) |
아사히 최고위 | 3 (1955, 1959, 1961) | 2 (1957, 1960) |
속기 명인전 | 1 (1956) | |
속기 선수권전 | 1 (1981) | 1 (1975) |
바둑 선수권전 | 1 (1958) | |
대체기 | 6 (1937-1938, 1941, 1951, 1953-1954) | |
일본 최강 | 2 (1959, 1961) | |
재팬 아시안 항공 컵 | 2 (1979-1980) | |
바둑 재팬 시리즈 | 1 (1976) | |
일본기원 제일위 | 4 (1961, 1963-1965) | |
3인 승점 경쟁 | 1 (1952) | |
4인 승점 경쟁 | 1 (1962) | |
일본기원 최고 단 | 1 (1951) | |
합계 | 72 | 23 |
날짜 | 기전 | 결과 | 상대 | |
---|---|---|---|---|
1 | 1963년 10월 11일 | 제11기 왕좌전 준결승 | 중반 | 시마무라 토시히로 9단 |
2 | 1963년 10월 21일 | 제11기 왕좌전 결승 3번기 1국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3 | 1963년 10월 28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4 | 1963년 11월 4일 | 제11기 왕좌전 결승 3번기 2국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5 | 1963년 11월 13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준결승 | 중반 | 마에다 겐지 9단 |
6 | 1963년 11월 29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 결정전 | 중반 | 시마무라 토시히로 9단 |
7 | 1963년 12월 19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1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8 | 1964년 1월 2일 | 제11회 NHK배 쟁탈 바둑 토너먼트 1회전 | 중반 | 한다 도겐 9단 |
9 | 1964년 1월 7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2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10 | 1964년 1월 15일 | 제11기 일본기원 선수권 도전기 3국 | 3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일본기원△ |
11 | 1964년 2월 6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중반 | 오오쿠보 이치겐 7단 |
12 | 1964년 2월 13일 | 제1기 십걸전 본선 | 중반 | 오오타케 히데오 6단 |
13 | 1964년 2월 20일 | 제4기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 도전기 1국 | 중반 | 오오히라 슈조 9단 |
14 | 1964년 2월 27일 | 제1기 십걸전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15 | 1964년 3월 1일 | 제11회 NHK배 준결승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16 | 1964년 3월 5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1집반 | 하시모토 쇼지 9단△ |
17 | 1964년 3월 12일 | 제4기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 도전기 2국 | 중반 | 오오히라 슈조 9단△ |
18 | 1964년 3월 15일 | 제11회 NHK배 결승 | 중반 |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 |
19 | 1964년 3월 19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7집반 | 사토 나오오 9단△ |
20 | 1964년 3월 25일 | 제12기 왕좌전 본선 | 중반 | 카다 카츠시 8단 |
21 | 1964년 4월 1일 | 제3기 십단전 본선 | 중반 | 후지사와 호사이 9단△ |
22 | 1964년 4월 7일 | 제1기 십걸전 결승 3번기 1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3 | 1964년 4월 11일 | 제1기 십걸전 결승 3번기 2국 | 2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4 | 1964년 4월 21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1국 | 1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5 | 1964년 5월 1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2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6 | 1964년 5월 13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3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7 | 1964년 5월 25일 | 제19기 본인방전 도전기 4국 | 중반 | 타카가와 슈카쿠 9단 |
28 | 1964년 7월 2일 | 제12기 왕좌전 본선 | 중반 | 하야시 히후 7단△ |
29 | 1964년 7월 29일 | 제3기 구 명인전 도전기 7번기 1국 | 4집 |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 |
타이틀 | 번기 | 획득 연도 | 등장 횟수 | 획득 기수 | 연패 횟수 | 명예 칭호 |
---|---|---|---|---|---|---|
명인 | 7번 승부 9-11월 | 1963-64년 | 6 | 2기 | 2 | |
본인방 | 7번 승부 5-7월 | 1961-67년 | 10 | 7기 (역대 3위) | 7 | 23세 본인방 |
왕좌 | 5번 승부 10-12월 | 1961, 63-64 66, 70-72년 | 10 | 7기 (역대 2위 타이) | 3 | |
십단 | 5번 승부 3-4월 | 1966-68, 72-73년 | 8 | 5기 (역대 3위 타이) | 3 | |
획득 합계 21 = 역대 6위 타이 | ||||||
{| style="width:100%;"
| style="vertical-align:top; text-align: left;" |
순위 | 획득 횟수 | 기사명 |
---|---|---|
1위 | 62기 | 26세 본인방 문유 |
2위 | 42기 | 조치훈 명예 2관 |
3위 | 35기 | 고바야시 고이치 명예 3관 |
4위 | 31기 | 가토 마사오 명예 왕좌 |
5위 | 24기 | 장쉬 9단 |
6위(공동) | 21기 | 23세 본인방 에이주 하야시 하이호 명예 천원 |
8위 | 17기 | 오타케 히데오 명예 기성 |
9위(공동) | 14기 | 후지사와 히데유키 명예 기성 야마시타 게이고 9단 |
2024년 12월 6일 기준 |
| style="vertical-align:top; text-align: left;" |
순위 | 획득 횟수 | 기사명 |
---|---|---|
1위 | 77기 | 26세 본인방 문유 |
2위 | 76기 | 조치훈 명예 2관 |
3위 | 64기 | 23세 본인방 에이주 |
4위 | 60기 | 고바야시 고이치 명예 3관 |
5위 | 48기 | 오타케 히데오 명예 기성 |
6위 | 47기 | 가토 마사오 명예 왕좌 |
7위 | 41기 | 장쉬 9단 |
8위 | 36기 | 이다 노리모토 9단 |
9위 | 35기 | 하야시 하이호 명예 천원 |
10위 | 28기 | 이치리키 료 9단 |
2024년 12월 6일 기준[13] |
|}
- NHK배 TV 바둑 토너먼트 1957-59, 61-62, 64-65, 72, 76-77, 82년 '''11기''' (최다 기록) (명예 NHK배 선수권자)
- 일본 기원 최고단자 토너먼트전 1951년
- 4강 리그전 1952년
- 최고위전 1955, 59, 61년
- 일본 기원 선수권전 1955-61, 64-65, 73-75년 (명예 일본 기원 선수권자)
- 속기 명인전 1956년
- 바둑 선수권전 1958
- 일본 최강 결정전 1959, 61년 (우칭위안과 동률 1위)
- 일본 기원 제1위 결정전 1961, 63-65년
- 3강 리그전 1962년 (우칭위안과 동률 1위)
- 프로 십걸전 1964, 67, 69년
- 일본 시리즈 1976년
- 일본 아시아 항공배 쟁탈 토너먼트 1979-80년
- 속기 선수권전 1981년
- NEC 컵 바둑 토너먼트전 1983년
5. 저서
사카타 에이오는 일본어로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그중 몇 권은 영어로 번역되었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현대 포석과 포석'', ''바둑의 중반전'', ''바둑의 급소와 악수'', ''바둑의 살수''가 있다.[1]
제목 | 출판사 | 출판 연도 | 비고 |
---|---|---|---|
『사카타의 바둑』(전 6권) | 헤이본샤 | 1963년 | 2004년 MYCOM 바둑 문고 스페셜로 복간 |
『이기는 - 바둑과 근성』 | 도쿠마 서점 | 1965년 | |
『사카타 에이오 (상) (하)』 (현대의 명국 9·10) | 세이분도 신코샤 | 1968년 | |
현대 포석과 화점, 제1권: 평행 포석 | 이시 출판 | 1968년, 2006년 재판 | |
현대 포석과 화점, 제2권: 바둑의 포석 이론 | 이시 출판 | 1971년, 2006년 재판 | |
바둑의 중반전 또는 "주반전" | 이시 출판 | 1971년 | |
『지도』(일본 바둑 대계 제5권) | 지쿠마 서방 | 1977년, 1991년 | 후지 미츠오 편 |
『사카타 에이오 (상) (하)』 (현대 바둑 대계 22.23) | 코단샤 | 1980년 | |
『사카타 일대 - 승부사의 계보』 | 일본기원 | 1984년 | |
『사카타 에이오 전집 (전 12권)』 | 일본기원 | 1984년 | |
『불꽃의 사카타 혈풍록 - 불멸의 타이틀 획득사』 | 헤이본샤 | 1986년 | |
『사카타 에이오 (현대 바둑 명승부 시리즈 9권)』 | 코단샤 | 1987년 | |
『불꽃의 승부사 사카타 에이오 (전 3권)』 | 일본기원 | 1991년 | |
『사카타 주옥 사활』 | 세이분도 신코샤 | 1995년 | |
사카타의 바둑 시리즈 | 이케다 서점 | 『바둑의 킬러 테크닉과 방어법』, 『바둑의 수와 속수 수와 형태를 기억하자』, 『바둑의 포석 전략 포석으로 리드하는 방법』, 『바둑의 사활과 요세 바둑의 최종 라운드』 |
6. 수상
국내 | ||
---|---|---|
기전 | 우승 | 준우승 |
명인 | 2 (1963-1964) | 4 (1965–1967, 1979) |
본인방전 | 7 (1961–1967) | 4 (1951, 1968, 1970, 1975) |
오자전 | 7 (1961, 1963-1964, 1966, 1970–1972) | 3 (1956, 1968, 1973) |
십단전 | 5 (1966–1968, 1972-1973) | 3 (1969, 1974, 1977) |
NEC배 | 1 (1983) | 1 (1984) |
NHK배 | 11 (1957–1959, 1961-1962, 1964-1965, 1972, 1976-1977, 1982) | 2 (1956, 1970) |
기성 | 12 (1955–1961, 1964-1965, 1973–1975) | 2 (1962, 1966) |
아사히 프로 베스트 10 | 3 (1964, 1967, 1969) | 1 (1968) |
아사히 최고위 | 3 (1955, 1959, 1961) | 2 (1957, 1960) |
속기 명인 | 1 (1956) | |
속기 선수권 | 1 (1981) | 1 (1975) |
바둑 선수권 | 1 (1958) | |
대체기 | 6 (1937-1938, 1941, 1951, 1953-1954) | |
일본 최강 | 2 (1959, 1961) | |
재팬 아시안 항공 컵 | 2 (1979-1980) | |
바둑 재팬 시리즈 | 1 (1976) | |
일본기원 제일위 | 4 (1961, 1963-1965) | |
3인 승점 경쟁 | 1 (1952) | |
4인 승점 경쟁 | 1 (1962) | |
일본기원 최고 단 | 1 (1951) | |
합계 | 72 | 23 |
7. 기타
- 1963년, 1964년, 1972년에 슈사대상을 수상하였다.[14]
- 1967년, 1972년에 기원상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하였다.[14]
- 1980년 자수포장을 받았다.
- 1981년 제32회 NHK 방송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1988년 오쿠라상을 수상하였다.[14]
- 1990년 훈2등 서보장과 제6회 도쿄도 문화상을 받았다.
- 1992년 바둑계 최초로 문화공로자에 선정되었다.
- 2010년 정사위에 추서되었다.
- 2019년 제16회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면도날 사카타" 외에도 "수비의 사카타", "무딘 칼 사카타", "공격의 사카타"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
- 사카타 에이오의 전성기에 야마베 도시로는 "사카타는 멀어져만 가네"라고 실력 차이를 한탄했고, 미야시타 히데히로는 "사카타 씨에게는 저희가 두 점을 깔고 둬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뛰어난 실적으로 인해 "대(大)사카타"라고 불리기도 했다.
- 다카가와 가쿠는 사카타에게 많은 타이틀을 빼앗겼으며, 타이틀전 대결 전적은 사카타의 14승 1패였다. 조치훈 또한 육단 시절 일본기원 선수권에서 사카타에게 도전하여 2연승 후 3연패를 당한 이후, 사카타에게 12연패를 당했다.
- 43세에 명인 본인보가 되었으나, 23세의 린하이펑 8단의 도전에 "20대의 명인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지만, 2승 4패로 명인을 빼앗겼다. 이후 린하이펑에게 본인보를 비롯한 다른 타이틀도 잇따라 빼앗기며, 투료 직전 "명인도 빼앗겼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 린하이펑은 사카타에 대해 "모든 기전에 전력 투구, '전부 이긴다'는 무서움이 있었습니다", "감상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대국에서 진 상대는 같은 날 두 번 지는 셈이다", "대국 중의 '졌습니다', '힘들어요'라는 푸념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하며, 사카타의 투지 넘치는 대국 자세를 평가했다.[14] 사카타 자신도 조치훈에 대해 "어떤 타이틀이라도 모두 가지러 간다는 바보 같은 점도 자신과 같다"라고 말했다.[15]
- 1962-63년에 바둑 클럽지상에서 문인 지도 바둑을 통해 작가들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곤도 게이타로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곤도는 1965년에 사카타를 모델로 한 소설 "바보 같은 신"을 써서 물의를 일으켰다. 곤도의 소개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가지야마 도시유키 등에게 바둑을 가르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著名棋手"64冠王"坂田荣男九段10月22日去世享年90岁
http://weiqi.sports.[...]
TOM.com
2010-10-22
[2]
서적
現代の名局6 呉清源(下)
誠文堂新社
[3]
서적
現代の名局10 坂田栄男(下)
誠文堂新光社
[4]
간행물
サンケイグラフ
産業経済新聞社
1955-01-30
[5]
서적
炎の坂田血風録
平凡社
[6]
문서
[7]
서적
炎の坂田血風録
平凡社
[8]
간행물
碁ワールド
2000-03
[9]
뉴스
囲碁の坂田栄男・二十三世本因坊が死去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010-10-22
[10]
간행물
碁ワールド
2011-01
[11]
웹사이트
坂田栄男、趙南哲が囲碁殿堂入り(第16回囲碁殿堂表彰)
https://www.nihonkii[...]
日本棋院
2019-10-26
[12]
웹사이트
囲碁界の連勝記録について
https://www.nihonkii[...]
2017-06-27
[13]
문서
[14]
웹사이트
坂田栄男さんを悼む 棋士・林海峰「勝負への執念 常に」(朝日新聞)
http://www.asahi.com[...]
2016-07-11
[15]
서적
鬼手
河出書房新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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